전자책 유통사가 출판에 뛰어드는 걸 좋게만 볼 수 없는 까닭

2012. 10. 23. 11:03

전자책 유통사에서 출판을 직접 하는 건 예상된 일이지만, 다음과 같은 점이 우려된다.


1) 잘 안 된다 싶으면 접으면 그만이다. 출판이 잘 안 되어도 유통사는 원래 하던 거 하면 된다. 그거 망한다고 유통사가 망하진 않는다. 절실하지 않다.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 책 한 권 한 권에 온 힘을 쏟는 출판사와는 절실함이 다르다.


2) 다른 출판사의 전자책보다 유통사가 만든 전자책을 민다. 당연히 남의 책보다 자기 책이 중요하니 메인 페이지 좋은 위치에서 노출을 많이 한다. 그런 노출 강점을 이용해서 저자를 회유한다. 기획 능력이 부족한 전자책 출판사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책을 잘 팔아주는 도우미 역할에서 벗어나 출판사 몫까지 뺏어가려고 하니 충돌이 불가피하다. 마치 대형 마트와 영세 상인들 싸움과 닮아있다.


3) 유통사가 책을 보는 시각은 '돈을 벌 수 있느냐 없느냐'다. 그러려면 최대한 빨리 많은 종수를 확보하는 게 최우선 목적이다. 지금처럼 전자책 시장이 좁은 상황이라면 더 많은 종수가 필요하다. 그걸 빨리하려다 보니 아무래도 책 한 권에 들이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완전히 제로부터 기획해서 원고를 다듬고 저자, 디자이너와 소통해서 책을 내는 느긋한(?) 일은 하기 어렵지 않을까. 


저자한테 받은 원고를 다듬지도 않고 소통도 안 하고 빨리 전자책으로 변환하는 수준에 그친다면, 저자 역시 그런 곳에 자기 원고를 맡기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유통사는 소설 분야처럼 별로 손을 안 대도 되는 원고를 찾아서 그 과정을 최대한 생략해서 빨리 내고 싶어할 텐데 소설이라도 최소한의 손길은 필요하다.


단순히 유통사가 편집자를 고용한다고 해서 유통사 마인드가 출판사 마인드로 바뀌진 않는다. 좋은 책을 만들기보다는 돈이 되는 방법, 출판사한테 콘텐츠 주십사 안 하고 어느 정도 독립할 방법을 찾은 게 직접 출판이니 고용된 편집자나 디자이너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을 것이다.


출판사 역시 비슷한 생각으로 출판하는 곳이 일부 있다. 매출 만들기 위해 무조건 책을 많이 내는 상황은 영업 논리가 앞선 출판사에서 편집자가 흔하게 겪는 상황 아닌가. 일반 단행본 기준으로 1년에 한 사람이 20권이고 30권이고 막 내는 책들이 정상적일 리 없다. 유통사에 고용된 편집자나 디자이너라면 그런 마인드 아래서 일하기 때문에 같은 상황, 그보다 더한 상황을 겪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좋은 책, 필요한 책을 기획할 수 있을까. 많이 계약해서 빨리 받고 많이 내는 시스템의 일부가 되기 쉽다고 본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독자가 그렇게 만들어진 책을 과연 좋아할까 하는 점이다.


슛을 남발하다가 겨우 한 골 넣는 식으로 어쩌다 전자책 한 권이 대박 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출판의 의미'가 빠진 유통사의 직접 출판 사업이 얼마나 오래갈지, 그것이 출판계와 독자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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