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하는 편집자

2012. 10. 1. 16:17

어느 정도 한 사람 몫을 하는 단행본 편집자라면 위에서 시키는 책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고 받기만 하는 건 좋지 않다. 책 편집자는 자기가 기획하고 만들어서 일을 할 수 있어야 편집자지, 남이 기획한 걸 받아먹기만 하면 그건 반쪽 짜리 편집자라고 생각한다.


남이 하라고 해서 진행한 책은 아무래도 애정이 덜하다. 게다가 해당 기획자가 자꾸 간섭하게 되면, 그게 작은 거라도 점점 그 책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편집의 공력이 달라진다. 책이 잘 되더라도 처음 기획을 했던 사람에게 더 많은 공이 가는 구조라면 더더욱 마지못해 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 자꾸 간섭을 받으면 '그럼 니가 하든지' 하고 말하고 싶어진다.


남의 기획을 받아서 만들면 책이 잘 안 팔렸을 때의 책임도 덜 수 있어서 부담이 크지 않다. 그렇지만 위험부담을 감수하지 않으니 얻는 것도 딱 그만큼이다. 늘 이러면 더 도전하지 않고 기획력이 없는 편집자가 되기도 한다. 그 결과, 출판사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지는 좁아진다.


아예 기획할 기회를 안 주는 출판사라면 마인드를 바꿔서 내 책이라고 암시를 거는 방법이 있다. 대신 시작하기 전에 아예 '이제부턴 제 일이니 간섭하지 말고 저를 믿고 맡기라'고 선을 긋는다. 그마저도 안 통하면 재미없는데 뭐하러 편집자 같은 걸 하고 있을까.

 

 

GRIJOA 편집자